“누가 장미란이야?..” 역도 영웅 장미란, 최근 공개된 근황에 난리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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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레전드 장미란, 그가 밝힌 키다리 아저씨의 정체
계약 조건은 정체를 밝히지 않는 것
장미란 근황

전 역도선수이자 베이징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현 용인대 체육학과 교수인 장미란의 달라진 모습이 화제가 되고 있다.

은퇴 이후 소식을 알 수 없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했던 장미란. 그가 최근 방영된 ‘유 퀴즈 온더 블럭’에 출연해 최근 근황을 공개했다.

장미란
온라인 커뮤니티

현역 선수 시절과 비교해 훨씬 더 늘씬해진 모습을 보고 일각에선 은퇴 후 다이어트를 한 것이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근육이 빠지면서 자연스럽게 체중이 줄어들었다고 밝혔다.

실제로 베이징 올림픽 시절에도 “살을 찌우는 게 정말 힘들다. 다음날 아침 체중이 빠지면 죄송할 정도”라고 고충을 토로하기도 했다.

선수 은퇴 후 교수 임용

대한민국 최초로 올림픽 역도 금메달을 획득하는 기염을 토한 장미란은 화려한 선수 생활을 은퇴 뒤, 용인대에서 체육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이후 2017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스포츠행정학 석사를 취득하고 다시 교수로 복직해 활동하고 있다.

장미란
장미란재단

장미란은 용인대 인터뷰를 통해 “교육자로서 학생들이 이해하기 쉬운 수업을 만드는 것이 목표이고, 나 역시 끊임없이 공부하고 어떻게 하면 쉬운 언어도 전달할지 고민하고 있다”고 교육자의 면모를 보여줬다.

장미란 재단 설립해 어려운 청소년 후원

장미란은 2012년 자신의 이름을 딴 ‘장미란 재단’을 설립하고 비인기 종목 선수과 어려운 스포츠 청소년, 탈북 청소년 등을 후원해 주고 있다.

金메달 숨은 조력자 있다고 밝혀

2023년 3월 1일에 방송된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는 전 역도선수 장미란이 현역 시절 자신을 후원해주던 키다리 아저씨에 대해 공개했다.

역도선수 장미란을 후원해주던 키다리 아저씨는 지금은 고인이 되신 오뚜기 故함태호 회장. 장미란은 함태호 회장이 “회사가 식품회사라 더 잘 먹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선수 때부터 도와줬다고 밝혔다.

장미란
사진=온라인커뮤니티

이어 “전지 훈련에 가면 필요한 것이 있어도 말하기 어려운데 故함태호 회장님은 전지훈련 날짜를 기억하고 계셨다가 선수촌으로 음식을 보내주시곤 하셨다”, “전지훈련을 해외에서 할 때면 법인장님께 말해서 “여기저기 구경시켜줘라”라고 말씀하셨다”라고 전했다.

다른 종목의 선수들이 부러울 때가 있기도 했지만, 저를 무조건 응원해 주시고 사랑해주시는 회장님 덕분에 다른 선수들이 전혀 부럽지 않았다. 너무 감사하다”라고 말하며 故함태호 회장을 향한 애틋하고 고마운 마음을 드러냈다.

24년간 약 4300여명에게 80억원 후원

2016년 9월 14일 식품업계 오뚜기의 창업주 故함태호 회장의 빈소가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에 차려졌다.

빈소를 찾은 사람 중에는 중학교 3학년생인 ‘최경훈’군과 ‘박하늘’양, 또 초등학교 5학년인 ‘한재균 군도 있었는데, 이들은 故함태호 회장의 후원으로 심장병 수술을 받은 아이들이었다.

오뚜기 회장
사진=오뚜기 홈페이지

이 당시 상주였던 ‘함영준’ 회장은 빈소를 찾은 아이들을 끌어 안으며 감사의 인사와 함께 잘 자라달라는 당부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이에 ‘최경훈’군은 “열심히 공부해 대학에 합격해서 할아버지를 찾아뵙고 싶었는데…”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장미란 근황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매년 태어나는 아이들 중 0.8%의 아이들이 선천성 심장병으로 인해 수술을 받아야 하지만, 수술비가 없어 수술을 받을 수 없다는 소식에 故함태호 회장은 1992년 부터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 후원’을 시작 했다고 밝혔다.

이후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 후원’은 24년 간 약 80억 원을 지원하고 있고 약 4300명 가량의 어린이를 후원하고 있다.

수천만원 넘는 수술비에 포기할 뻔 한 아이 살려준 회장님

오뚜기의 후원을 받았던 ‘한’ 군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뇌졸중으로 일을 할 수 없어 할아버지와 할머니 손에 자랐다.

장미란 근황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학원 셔틀버스를 운전하며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할아버지의 한 달 수입은 고작 85만원, 이 돈으로는 한번 수술 할 때마다 1,000만원이 넘는 비용과 입원비를 낼 수 없었다고 방시 상황을 밝혔다.

‘한’ 군의 할머니 ‘송경배’ 씨는 산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나 싶어 아이를 그냥 천국으로 보내자 말하기도 했었다고 밝혔는데, 당시 오뚜기 故함태호 회장님의 후원으로 인해 총 다섯 번의 수술비를 지원받았다고 한다.

이에 ‘송경배’ 씨는 회장님의 도움은 우리 가족에게는 생명줄같이 절실했다 말하며, 회장님을 향한 감사한 마음을 드러냈다.

후원자들 편지에 잊지 않고 답장해준 회장님

故함태호 회장님은 자신의 이런 선행들이 알려지는 것을 매우 꺼려했는데, 후원을 받은 사람들이 고마운 마음을 담아 보낸 편지에 항상 답장을 보내주었다.

지난 2012년에도 ‘최경훈’ 군이 보낸 편지에 “경훈군 더욱 건강하고 수영도 잘하고, 공부도 열심히하는 멋있는 청년으로 자라준다면 내가 더 바랄게 없습니다”라고 답장을 보내기도 했다.

오뚜기 회장
사진=오뚜기 홈페이지

‘최경훈’ 군의 어머니 ‘이영옥’ 씨에게는 “대한민국의 미래이자 일꾼인 어린아이들이 수술비가 없어 생명을 잃지 않도록 계속 후원하여 더 많은 아이들이 활기차게 뛰어다닐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라고 답장하기도 했다.

故함태호 회장은 4,000번째 후원 아동 기념행사에서 5,000번째 후원이 이루어지는 걸 보고 싶다고 말했지만, 안타깝게도 5,000번째 후원자를 직접 보지는 못하게 됐다.

장미란 유퀴즈
사진=오뚜기 홈페이지

오뚜기 창업주 故함태호 회장

오뚜기 故함태호 회장은 조흥화학공업 ‘함형준’ 사장과 모친 ‘이덕발’ 씨의 장남으로 1930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기고등학교 출신이었는데 고등학교에 다니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해 피난을 가야했지만, 피난 대신 ‘자원 입대’라는 큰 결심을 했다.

이후 故함태호 회장은 육군종합학교를 거쳐 소위로 임관하여 1957년까지 군인 신분으로서 근무했다.

오뚜기 회장
사진=오뚜기 홈페이지

故함태호 회장은 1969년 오뚜기의 전신인 ‘풍림상사’를 세우며 오뚜기의 시작을 알렸다. ‘풍림상사’라는 사명아래에서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카레라이스, 스프, 케첩, 마요네즈 등을 출시하였고 1973년에 우리가 알고있는 ‘오뚜기식품공업’으로 사명을 변경하며 오뚜기보다 7배나 더 큰 ‘서울식품공업’을 앞지르며 식품업계에서 위상을 떨쳤다.

김성민 기자
financemin@financ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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