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분기 중고 전기차 1만832대 판매
매입부터 판매까지 19일로 빨라
배터리 재활용으로 미래 광산 부상

“신차로는 부담스럽다”…이유는 가격만이 아니었다.
충전 인프라 부족, 보조금 감소, 그리고 소비자의 눈높이까지. 전기차는 한때 신차 시장의 기대주였지만, 최근엔 잊힌 존재가 돼 있었다.
그런데 중고차 시장에선 상황이 전혀 다르다. 한때 외면받던 전기차가 중고 시장에선 ‘귀한 몸’이 됐다. 판매량은 물론이고 시세, 거래 속도까지 내연기관차를 뛰어넘고 있다.
전기차, 중고차 시장서 ‘역전’ 드라마

올해 1분기(1~3월) 국내 중고차 시장 전체 거래량은 약 49만대로 전년 동기보다 4% 줄었다. 하지만 이런 침체 속에서도 단연 돋보인 차종이 있었다.
바로 전기차다. 시장조사기관 카이즈유데이터연구소에 따르면 같은 기간 중고 전기차 판매량은 전년 대비 47.4%나 급증했다.
하이브리드 차량이 15.6% 증가하며 상승세를 이어갔지만, 작년 증가율(36.2%)에는 크게 못 미쳤다. 휘발유 차량은 3%, 디젤은 10.4%, LPG 차량은 8.6%씩 판매가 줄었다.

가격도 높다. 중고차 플랫폼 케이카에 따르면 이달 기준 중고 전기차의 평균 시세는 2666만 원으로 하이브리드(2626만 원)나 휘발유차(1985만 원)보다 비쌌다.
하지만 판매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 19일로, 휘발유차(33일)나 하이브리드(43일)보다 훨씬 짧았다. 비싸도 잘 팔린다는 얘기다.
수리비·내구성 걱정 없다…“기능보다 구조”

전기차가 중고차 시장에서 각광받는 배경에는 ‘신뢰’가 있다. 전기차는 내연기관차보다 구조가 단순해 고장 확률이 낮다. 독일 자동차협회 ADAC는 전기차의 고장 건수가 1000대당 4.2건으로, 내연차(10.4건)의 절반 수준이라 밝혔다.
업계 관계자는 “구매자 입장에서는 예상치 못한 수리비가 가장 큰 리스크”라며 “전기차는 유지비도 낮고, 부품 수가 적어 장기적으로도 유리한 선택지”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강점은 배터리다. 전기차에서 가장 비싼 부품인 배터리는 전체 차량 가격의 40%를 차지한다. 최근엔 배터리를 재활용해 금속을 회수하거나 ESS(에너지 저장 장치)로 활용하는 기술도 빠르게 발전 중이다.

이에 따라 “전기차는 시간이 지나도 가치가 급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가 퍼지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배터리가 있는 중고 전기차는 마치 ‘도시의 광산’처럼 미래 자산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SUV·경차 인기, 실용성 중심으로 재편

과거 중고 전기차 시장의 주류는 테슬라 모델3 같은 수입 고급차였다. 하지만 최근엔 실용성이 높은 국산 SUV나 경차가 인기를 끌고 있다.
올해 1분기 판매량 상위권은 현대차 아이오닉5, 기아 EV6, 테슬라 모델3 순이었다. 특히 모델3는 2년 전까지만 해도 1위를 지켰지만, 이제는 3위까지 밀려났다.
눈에 띄는 변화는 소형 SUV ‘코나 일렉트릭’과 경차 ‘레이 EV’의 부상이다. 크기는 작지만 실내공간이 넓어 자영업자 영업용이나 세컨드카로 활용도가 높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이제는 브랜드나 사양보다도 ‘어디에 쓸 것인가’를 기준으로 소비자가 움직인다”며 “이런 흐름은 중고 전기차 수요를 더 넓힐 것”이라고 분석했다.
전기차 보조금 조기 소진…중고 시장에 불씨

신차 시장에서의 전기차 수요 위축도 중고차 시장을 자극했다. 올해 1분기 전기차 신차 판매량은 전년 대비 31% 증가했지만, 전국 지방자치단체의 보조금은 빠르게 바닥났다.
덕분에 신차 구매를 계획했던 소비자들이 자연스럽게 중고차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중고차 플랫폼 케이카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10년 이내 출시된 전기차 모델 중 인기 있는 차량들의 시세가 일제히 오르고 있다.
현대차 캐스퍼 일렉트릭(2225만 원)은 전월 대비 4.7% 상승했고, 기아 더 뉴 EV6(4375만 원), 코나 일렉트릭(2875만 원), 아이오닉5(3223만 원) 역시 모두 시세가 올랐다.

케이카의 조은형 애널리스트는 “전기차에 대한 소비자의 판단이 보다 신중해지고 있지만, 그 안에서도 실속 있는 모델에 대한 수요는 여전히 강하다”며 “반면 하이브리드는 세제 혜택 축소 등의 영향으로 관심이 다소 줄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한편 중고 전기차 시장의 이례적인 성장세는 단발성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전기차 기술이 지속 발전하고, 배터리 가치가 높아지는 지금, 전기차는 더 이상 ‘조심스러운 선택’이 아니다. 특히 중고차 시장에선 그 존재감이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